목포는 왜, 눈물을 노래했는가?

 

 

 

 

 

 

목포시 문화관광 해설사

곽 순 임

 

 

 

 

 

일본의 침입과 강화도 조약

 

일본은 조선이 일본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펴자 조선에 무력으로 진출을 시도하기위해 군함 30여척 (운요호, 운양호 등) 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875년 8월 21일 일본은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진을 공격하고 일본군을 상륙시켜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하게 된다.

전투결과, 조선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모두 패하였다.

고종13년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약 (한일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으로 조선에게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있으며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하고 부산 외에 두 개가 항구를 개항하며 개항장을 설치하고 개항장내의 일본인의 치외 법권 인정, 일본이 자유롭게 조선연해를 드나들 수 있게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성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반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 결국, 조선정부에서는 부산 1876년, 원산 1880년, 인천 1883년에 항구도시로서 개항하게되니 이는 일본의 강압적인 개항이라 하겠다.

 

목포개항과 의의

 

목포개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미 개항된 개항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일본과의 조약에 의한 개항이 아닌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자주적인 개항이었으며 일본인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으로 무안감리서와 목포해관을 미리 설치하여 개항장 업무를 차근히 준비했다.

즉, 개항장을 늘리고 무역을 늘림으로써 관세수입을 늘리고 이를 담보로 차관을 빌린다던가, 직접 재정수입원을 늘릴 수 있다는데 착안한 것이며 지주 상인층을 육성하여 자본가 층을 육성하고자 하는데 구상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정부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1897년 10월 1일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목포가 개항을 하게 되지만 그전에 이미(1894년) 일본 측에 의해 목포개항이 요구된바 있었으나 아관파천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 조선에 강요할만한 힘이나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 무산되었다.

따라서 목포의 개항은 일본과의 강제조약에 의한 것이 아닌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미리 준비된 자주적인 개항이었다는데 크게 의미를 두고 있다. 목포개항은 역사적,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영산강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배로 직접 화물 운반이 가능하며, 화물의 집하장으로 이용하기에 적합하고 호남평야의 쌀을 수송하기에 편리한 항구라는 점에서 작용된 결과였다

 

일본인 거류지 형성

 

일본은 항구도시의 특성을 이용하여 물류기지로의 수탈을 자행하면서 자국의 농어민을 조선으로 이주해 온다.

목포도 예외는 아니다. 개항당시 목포는 목포 진을 중심으로 유달산 봉수대를 운영하는 사람들과 진을 지키는 군사 외 다수의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1898년부터 일본 큐슈지방의 농어민들이 하나둘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작은 촌락마을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주를 당하고, 600년 역사를 간직해온 목포진 또한 일본에 의해 폐진을 당하게 된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척박한 곳을 매립을 해가며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하고 영역을 넓혀가면서 토지를 매매하기 시작한다. 당시 거류지는 갯벌이 아니면 논, 언덕으로 매립을 하거나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내지 않으면 한곳도 건축에 적합한 곳은 없었다.

점차 시가체제를 갖추기에 이르고 일본인 마을은 선창가주변을 거류지 중심으로 발전해 나간 것에 비해 조선인들은 유달산 자락을 터전으로 옹기종기 초가집을 짓고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개항장 안에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고 인구는 늘어나 1920년대 목포인구수는 3만여명이었으나, 1930년대에는 6만여명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면적 8.6km² 로 전국의 3개항 6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구) 일본 목포 영사관

 

 

일본은 목포개항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영사관을 짓고 영사를 파견하여 위임장을 주고 목포주재 일본영사임을 공인하게 한다.

1910년 발행된 “목포진”(일본인 의 기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일본측의 목포 진출과 외교업무를 위해서 1897년 10월 26일 처음 목포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의 이익 특히 무역, 교통 및 조약의 거류를 준수케 하며 일본

또는 일본과 우호적인 타국시민의 의뢰나 청구가 있을 때 공권력을 부여하고 일본법을 훈령에 준거하여 재반 사무를 담당케 한다‘ 라고 하는 명목하에 목포주재 일본영사관을 설립했다.

물론 처음부터 영사관 건물을 건축한 것은 아니다.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던 중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1900년 1월부터 (현)영사관자리에 건물을 신축, 동년 12월에 완공한다. 군수물풉과 하납도 물품을 일본으로 빼돌렸던 항구중 하나인 목포항은 1897년 개항이후 근대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무인감리서는 우리 정부가 외교업무와 지방행정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하였다면, 일본영사관은 일본정부에 의해 목포진출과 침탈, 지방행정, 외교업무를 목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목포개항이후 최초 서양식 건물이면서 가장 높은 건물 이었던 영사관 건물은 장방형의 2층 구조에 붉은 벽돌과 흰색벽돌을 사용하였고, 좌우대칭으로 전면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현관은 목재로 입구를 돌출시켜 만들었고, 창문은 아치형에 오르내림 창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건물의 내부에는 각 실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여 모두 9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2층의 두 곳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 1기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집 한 채 값을 호가하는 고가품 이였다고 한다.

건물의 외벽을 보면 건물의 중심부 상단에 위치한 원모양에는 일본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변하여 그 문양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아서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 하다. 양측 벽면의 상단에 일장기 모형의 벽돌배치, 건물내부 벽난로에 새겨진 벚꽃 문양 등이 일본 건축임을 암시하는 물적 증거들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목포의 수탈

 

 

일제식민지배와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3월 일본국 제24회의에서 동양척식 회사법이라는 것이 통과됨에 따라서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위해 만들어진 일본의 국책 회사이다.

일제식민정책의 선봉기관이며, 조선농민의 수탈기관으로서 일제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다.

일본농민을 조선 이주를 목적으로 한 회사로서 설립이 확정됨에 따라 일본에서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일본정부와 한국정부 즉 한,일 양국의 이중국적 회사로 출발했다.

설립당시 자본금은 1,000만원 이였다.

한국정부는 설립자본금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하지만 일본정부가 독단적으로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식민지 척식사업을 담당한다.

창립당시 척식에 필요한 농업, 토지매매, 임차, 경영 등의 한국농민에게 필요한 물품공급과 생산, 획득물품의 분배, 척식자금의 공급 등 일본정부가 허가하는 부대사업등을 총괄하였다.

회사법의 개정에 따라 척식자금의 공급에 주력하면서 토지수탈을 전제로한 일본농어민 이주사업, 농업경영, 토지개량 등의 사업에 초점을 두었다.

창립당시 양국의 이중국적의 회사로 출발했으나, 1910년 한국이 모든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국적의 회사로 탈바꿈 하게되고 조선농민의 수탈기관이요, 한국인의 피를 빨아먹는 유령회사가 되었다.

서울에 본점을 두다가 도쿄로 본점을 이전하고 1938년 말에는 전국에 9개의 지점을 갖게 되면서 총 831명의 직원을 두게 된다.

일본정부는 목포가 개항지로서 급속도로 성장하자, 1920년 6월에 동척 목포지점을 설립하게했다.

목포지점 설립당시 목포의 인구는 3만여명에 달했고 그 중 일본인은 2000여호 가구수에 1만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거류지영역을 확실히 굳혀가고 있었다.

목포지점 동척에는 관리부와 금융부가 있었는데 관리부에서는 농토관리 즉, 소작관리를 주로 했으며 일본인을 상대로 동척 농업이민계획을 정치적으로 펼쳐서 조선지역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 하여 조선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금융부에서는 각 농가에 돈을 융자해주는 일을 담당했다.

일본농어민에 대해서는 각종 특혜를 줌으로써 일본 농민들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한국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불이익의 대상이였다.

대출이자가 연금리 3부였고, 담보 없이는 대출도 가능하지 않았다한다.

목포지점은 설립당시 전남 각 지역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전국의 9개 지점중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두던 1위 지점이었다.

 

 

 

 

목포의 눈물

 

부동산 담보대출을 통해 조선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던 동척이 목포에지점을 설립한 이유를 본다면 농수산물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목포에서는 1900년 초부터 육지면화 시험재배지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광범위한 목화재배를 했고 목포인근에 위치한 나주평야에서 나는 쌀, 신안의 소금과 김, 그리고 영암,무안에서 농작물을 공출하여 배를 이용하여 운송하기 좋은 입지조건에 있었고, 1906년에 착공한 국도 1,2호선이 1911년에 개통하게 되는데, 1호선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939.10km),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직선거리를 말하고, 2호선은 목포에서 부산 (353.60km)까지, 즉 서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육로를 이용하여 중국까지 화물을 운송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1914년에 호남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호남지역의 곡물이 기차를 이용해 일본으로 공출 하기위한 화물 수선이 많았으며 실제로 목포에서 부산까지 14시간 걸린 완행열차가 1980년대 까지 운행을 했었다.

또한 배를 이용해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하기 좋은 입지조건에 있었던 이유가 크겠다.

이렇듯 일본은 전국 곳곳에서 만행을 저질렀고 특히, 동척건물은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을 위한 기관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교묘한 방법으로 수탈했었다는 점과 이로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뼈저린 아픔을 겪었을 우리

조상님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고, 목포를 근대도시라 칭한다면 이 건물은 근대건축으로 분류하고 일본의 건축이면서도 도지정 문화재, 지방기념물 제 174호로 지정을 했다.

 

 

1930년대 유행했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에 등장하는 목포의

설움을 만들어 냈던 근원지가 되기도 한 동척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물이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될 위기에 놓여 건물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 본건물만 남아 근대역사관으로 명명하였다.

끝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한때는 금지를 당했던 “목포의 눈물” 노래 한곡을 목포를 찾으신 모든 분들께 선물하면서 암울했던 목포의 옛 과거사를 마무리 한다.

  

 

 


 

목포의 눈물

 

작사 문일석

작곡 손목인

노래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 드든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닮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밤 조각 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posted by 해맑은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