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도 부활을 노래하다

 

                                                                               문화관광해설사 이옥희

 

 

 

 과거의 삼학도  

 복원된 삼학도 


 

  자연과 사람보다 정겨운 노래로 먼저 가슴에 자리 잡은 도시가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목포입니다. 유달산과 영산강 삼학도의 항구도시 “목포”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그 속에 겹겹이 쌓인 이야기에 시대의 추억이 쌓인 곳, 호남선의 종착역 바로 목포입니다.

그 노래 속에 삼학도 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삼학도에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목포는 땅이 좁아 약 60~70%가 간척 매립지 인데 저기 목포 앞바다 건너편에 세 개의 섬 삼학도도 보시는 것처럼 옛날에는 물에 잠겨 있던 섬이었지만 현재는 교량과 수로를 새로 만들어 복원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을 볼때 삼학도는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었던 국유지로 1439년에 조선의 군사 요충지 였던 목포진의 땔감나무 공급지 였으며 일제 강점기 한일 합방 당시에는 고하도와 더불어 목포진 관리자인 김득추란 사람에 의해 1895년 개항 2년전 일본인 삽곡용랑의 손에 넘어간 이른 바 역사적인 삼학도 암매사건이 있었으나 광복 이 후 조선의 딸으로 복귀되었고 삼학도가 훼손이 된 것은 일본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삼학도가 원형을 잃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 50년대, 60년대의 상황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시대는 그들의 근대화 건물을 짓기 위한 체석작업으로 인해 삼학도의 부분적인 훼손이 있기는 했지만 그대로 세 개의 섬으로서의 원형은 유지 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심이 팽창함에 따라 ‘삼학도 매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졌으며 1956년 삼학도 제방 축조에 대한 계획 수립이 구체화되었는데 1957년 2월 당신 우리 나라 해무청은 “ 목포항을 부산의 다음가는 대항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삼학도 축항 공사계획을 확실히 진척시켜 대항구의 구현을 바라게 할 것“이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삼학도 매립이 시작되어 1961년에는 대삼학도와 용해동 갓바위를 잇는 방조제가 쌓였고, 그리고 1965년에는 세 섬(대삼학, 중삼학, 소감학도)사이의 매립공사가 실시되어 삼학도는 1974년에 섬으로써 형태를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방공사가 이루어지고 나서 부작용 중 하나로 목포의 상징이였던 삼학도는 현재의 목포진의 터 밑에 자리하던 휘파리 골목의 홍등가가 도심에서 밀려나 속칭 엘로우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어촌의 전형적인 밀집 지역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도 당시의 큰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한 삼학도의 역사를 볼 때 실제 목포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수 있었던 시기가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목포시민들이 삼학도에 강한 애착을 지니는 이유와 삼학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할수 있는 시기는 광복 직후부터 50년대 후반까지로 볼수 있습니다.

이 시절에는 단오때만 되면 삼학도에서 씨름대회를 비롯해서 난장축제가 벌어졌었는데, 그때가 목포시민들이 피부로 접할수 있었던 삼학도에 대한 추억의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면 이처럼 실제 경험보다 삼학도가 지니는 정서적인 상징성이 못포 시민은 물론 우리 국민들에게 강항 인상을 남기게 된 이유는 1932년 일제 강점기의 설움의 맥을 같이 하여 이난영이 불렀던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삼학도라는 단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복 이후 삼학도의 운명은 마치 목포의 운명처럼 다가왔으며, 섣부른 매립으로 인해 제 모습을 잃어버리는, 그리고 홍등가가 자리하게 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삼학도는 주로 목포사람의 애완이 담긴 것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호남의 설움이나 목포의 소외 같은 정서가 삼학도와 함께 목포사람들 가슴깊이 인식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학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달산 장수와 세 처녀의 사랑에 관한 전설 속 배경이 깔려 있으며 세 처녀의 혼이 변해서 세 개의 섬이 되었기 때문에 삼학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학도는 현재 부활을 노래 하고 있습니다. 현재 추진중인 삼학도 복원화 사업은 목포 사람들에게는 어떤 자신감의 회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학도는 또한 사람들의 꿈이요 미래였습니다.

현재 복원중인 삼학도는 3만평의 면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삼학도를 재현하고 주변의 교량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이난영 공원, 어린이바다과학 체험관, 넓은 공연장과 2009년 7월에 준공된 요트 마리너 시설은 요트세일링을 하기에 최고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며 유달산의 낙조와 흰색의 요트가 어울어진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도심의 생활 공간에 인접 서남권 최고의 마리너 시설로 평가 받고 있으며 내항어선의 북항 이전계획에 따라 삼학도 내항을 2019년 까지 단계적으로 600여척의 규모의 요트전용항으로 탈바꿈 될 계획이다.

 

 

 목포 요트마리나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삼학도 는 과거의 삼학도가 주던 우울함과 암울함을 벗어 목포의 희망을 노래하는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그 문화는 바뀔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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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태산, 그리고 무릉도원

 

목포문화관광해설사 박 영 안

 

 

 

유월(6월)들어 시내 한 복판은 벌써 훅훅 한여름의 열기가 느껴집니다.

60이 넘어 보이는- 아직은 장년티가 나는 남자 한분이 불쑥 한 마디 하십니다.

“유달산이 천하의 명산이야!”

내가 짐짓 물었습니다.

“명산이야, 명산”하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선생님처럼 “천하의 명산”이라 하는 이는 저로서는 처음 뵙습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그러자 그 분은 빙긋 웃으며 ,

“그야, 유달산이 하늘 아래 있고 수 많은 이가 찾고 알려졌으니 천하의 명산 아닙니까?”하고 싱거운 소리를 하십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명산(名山)이란 영어로는 noted mountain- “이름난 산”을 말 합니다.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

제주의 한라산도 역시 소위 말하는 명산이 틀림없습니다.

그 지방의 명산이며 제주의 한라산은 전 국민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유달산은 어떠합니까?

어린이들은 몰라도 전 국민이 압니다.

유달산의 딸 난영이가- 최초의 일등 국민가수가 이쁜 목소리로 열심히 일려 더욱이나 확실히 뼈저리게 압니다.

월출산, 무등산은 산악인이나 그 지역의 사람만 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달산은 높지 않습니다.

어떤 서양인이 말했듯이 “hill{언덕)”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도, 찾는 이 모두가 좋아하고, 자주 찾습니다.

산 밑에 사는 목포사람 중엔 매일 오르는 이도 많습니다.

월출산을 삼백번인가를 오르셨다는 70넘은 원로 산악인은 그렇다면, 30년만 계산해도 “만번”도 넘게 ?!..우와~~~

다시 한번, 다른 산과 유달산을 비교하여 생각 해 보도록 하지요.~~~

 

조각공원 

낙조대 


중국의 태산(泰山)과 비교하면, 태산 역시 천하의 명산이지요.

중국의 산동성(山東省)태안(泰安)의 북쪽 오악(五嶽)중 하나이며, 예로부터 천자(天子)가 제후(諸侯)를 이곳에 모아 놓고, 때때로 봉선(封禪)을 행 한 도교(道敎)의 영지(靈地)랍니다.

해발 1,535m.

저도 언젠가 배낭여행으로 가고 싶은 곳 중 한 곳입니다.

이 태산에 얽힌 어휘, 속담도 많습니다.

泰자 자체가 太자와 엇 바꿔 쓰이는데, “크고, 넉넉하고, 편안하고, 너그러이 포용함을 나타냅니다.

태산 관련 어휘 중 저로서는,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에 주목합니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도령이 넓어 많은 것을 포용(包容)함”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제 할아버지를 품어 주셨고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를 잉태한 유달산 역시 중국의 태산만큼이나 의미있는 산입니다. 목포사람 외에도 그 동안 오간 수많은 사람의 사연을 잉태한, 어린이는 몰라도 삶에 찌들은 전 국민의 마음의 산이지요.

물 건너 영암은 물론 그 뒤로 보이는 해남 그리고 진도, 저 다리 넘어 신안, 목포가 야금야금 잡아먹고 몸집을 키운 무안-모두들 모여와 살을 비비며 새끼 낳고 살았습니다. 소금 내려고 시금치 캐려고 홍어 잡으려고 섬에 가서 빨리 돌아오지 못 하면 하숙집에 맡기거나 자취를 시켰습니다.

유달산은 원래는 바위산인데, 바위구석구석에 팔도에서 묻혀 들어온 힌줌의 흙과 멀리는 중국에서 날아든 황사까지도...

그리고 잠시 살다간 일인(日人)들의 시신 까지도..

유달산은 품어 안고 있습니다.

맨손으로 상륙하여, 한때, 황해도와 전라도의 “억”소리 날 만큼의 옥답을 여러 편법을 동원하여, 어거지로 사들여, 대지주로 군림했던 일인들이 다시 본래의 섬으로 쫓겨 들어가고 일부는 한줌의 재가 되어 유달산의 북편 어느 바위밑에 칩거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잊어 버리는 기술 또한. 가진 우리 민족은, 그중에서도 가장 그 특성을 잘 나타내는 우리 목포 사람들은, 아예, 그 원수 같았던 일인의 무덤 속이나 옆에서 둥지를 틀고, 알콩달콩 이웃집과 쑥 개떡을 만들어 먹거나 파전에 쌀 막걸리를 들이키면서 목포의 눈물을 맥없이 불러대며 그래도 안식을 찾는다는 겁니다.

유달산은 세상만사가 지겹고 괴로워 사람을 떠나 깊은 산속 을 찾아 나서는 그런 은둔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산입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산 정상 어느 바위아래 추운 겨울이 지나고 유골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달산은 그런 이에게 살맛을 찾게 해주는 치유의 산인데 그만, 오해하고 성급하게 생을 마감하고 참삶터를 지난겁니다.

유달산은 중국의 태산보다 오히려 낮고 오르는 계단 수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두번 손님들이 물어보셔서 마음먹고 유달산의 계단 수를 직접 답사 하여 세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세 번 씩이나 그려가며 꼼꼼히 작업(?)을 수행했는 데도 우리 선배님들이 어찌나 헛 갈리게 예술적으로 만드셨는 지 계단인지 아닌지 판단이 가지 않는 것이 몇 있어 내나름대로 1111개라 공표 한적이 있었는데 후배 해설사들이 그런줄 알고 있습니다. 신안군이 지역내 섬 수를 1004개로 집계하여 공표한 속마음과 비슷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한발 한발 오르면 노적봉 대학루 코스로 한 3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손님들의 전언에 의하면 일본의 산은 한국처럼 나지막하고 사람이 깃들어 사는, 사람과 친한 그런 산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유달산은 밥 먹고 잠간 올라가 호연지기를 키우는 뒷동산 같은 그런 산입니다. 저 또한 연 날리고 숨바꼭질하고 고무줄 새총으로 지금의 서바이벌 놀이를 즐겨하던 정든 바위산이었습니다.

560년 전 안견이 그리고 안평대군이 꿈꾸던, 말 타고 계곡을 지나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폭포 앞에 땀을 식히는 그런 웅장한 그런 산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유달산엔 세상의 모든 산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 강도 있고 바다도 있고 갯벌도 있고 목탁소리 은은한 절도 많고 점치는 집도 많고 교회도 많습니다. 기차도 있고 뱃고동 소리도 들립니다.

그 무엇보다,

꾸밈없는 사람들의 멋이 있습니다.

그들이 차린 맛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동아 원색세계대백과사전. 동아출판사 1989

전남의 명산. 전라남도. 2004.

황홀. 그림과 시에 사로잡히다. 임희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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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맛이야

 

문화관광해설사 김 향 원

 

 

맛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바다 목포입니다.

‘목포는 항구다’ 이난영선생의 노래처럼 목포는 바다에 둘러싸여 바다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수산도시가 되어 숙명처럼 물고기를 잡는 사람, 손질하는 사람, 판매하는 사람, 포장해주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물고기들로 인하여 밥 굶지 않고 먹고 잘살고 있답니다. 또한 이로 인해 목포의 경제도 힘차게 움직이며 바다의 물고기가 우리목포의 경제를 쥐락펴락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목포 앞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들로 이루어진 민어회, 홍어삼합, 세발낙지, 갈치조림, 꽃게무침 등 맛있는 목포가 5미를 선보이며 그냥갈수 없는 식도락가들의 입맛과 식욕을 자극합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목포에서는 개미가 있다고 합니다. 개미를 국어사전에서는 ‘전라도 방언이며 씹을수록 고소한 맛’ 이라고 되어 있어 전라도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음식 맛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개미라는 것입니다. 개미는 서해의 잘 발달된 갯벌에서 자란 찰지고 맛난 해산물들을 의미하고 풍족한 양념을 듬뿍 넣는 전라도 손맛 또한 개미인 것으로 음식하면 전라도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민어

목포에는 민어 전문횟집이 즐비한 민어의 거리가 있습니다. 한여름이 가까워 오면 민어 생각에 서남해안사람들은 맛있는 군침을 흘립니다. 가족모임에도 계모임 할 때도 1년에 한 번 있는 민어의 철을 놓치지 않고 한 여름 복 달임으로 또는 보양식으로 민어를 먹습니다.

우리선조들은 민어탕이 1품, 도미탕이 2품, 보신탕이 3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린내가 없고 담백한 민어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양반들은 한 여름 복달임으로 귀한 민어탕을 먹어야 여름을 나고 뭇 백성들은 구하기 쉬운 보신탕이라도 먹어야 한 여름을 수월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민어는 아주 큰 생선으로 활어 상태가 아니라 주로 선어로서 먹는데 클수록 더욱 맛있다고 합니다. 육해공 먹거리 모두를 아울러 암컷이 맛있다고들 알고 있지만 그러나 민어만은 그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7~9월에 산란하는 암컷의 배에 가득들은 알을 빼내면 살도 많지 않고 찰지지도 않아 탄력 있고 탱탱한 수컷을 많이 선호하며 가격차이도 아주 월등한 차이가 있습니다.

민어는 크기 때문에 참치처럼 부위별로 맛이 약간씩 다른데 배는 기름지고 고소하고 꼬리와 지느러미는 운동량이 많아 탄력이 강하며 가운데 살은 부드럽다고 합니다. 민어는 회를 도톰하게 썰어야 맛있고 껍질은 끓은 물에 살짝 샤브샤브로 쫀득쫀득한 감칠맛을 즐기고, 양이 많지 않기에 남들보다 빠른 손놀림이 필요한 부레는 회로 먹으면 입에서 씹히는 질감이 예술입니다.

부레는 경골어류의 몸속에 있는 공기주머니로 뜨고 갈아 앉는 것을 조절하고 평형을 유지하는 감각기관이기도 합니다. 민어의 부레는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나전칠기, 합죽선, 각궁 등 전통공예는 민어부레를 말려 푹 고아 만든 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민어부레로 만든 풀을 부레풀이라고 하고 짐승의 힘줄, 가죽 뼈 등을 고아서 굳힌 풀을 아교라고 합니다. 부레풀과 아교는 지금의 본드 역할을 하는 것인데 본드는 어느 접착제 회사의 이름이랍니다.

민어는 정말 버릴 것이 없습니다. 쓸개조차도 술에 타서 먹고 뼈는 물에 넣고 맑게 지리로 우려내어 뽀얀 국물을 땀 흘리며 먹고 나면 여름날 지친 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음식으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환상적인 맛 그자체입니다.

 

홍어

  • 남도는 따뜻하면 굴비생각 추워지면 홍어생각이라는 속담이 있고 몸의 폭이 넓어 ‘넓을 홍’자의 홍어는 날이 추워야 살이 오르는 11월~12월이 제철입니다.

    지옥 같은 향기, 천국 같은 맛을 지니고 있는 홍어는 음식의 충신이라고 했을 만큼 삭인 홍어 먹고 탈이 난사람은 없다고 하며 1코, 2애, 3날개, 4살, 5오돌뼈 순서로 맛있다고 합니다.

 

   전라도 관혼상제 잔칫집에서는 홍어가 빠지면 아무리 다른 음식이 넘쳐나도 먹을 것이 없다고 욕을 먹을 만큼 삭힌 홍어는 전라도 특히 남도사람들의 입맛에 착! 달라붙는 개미가 있는 음식입니다. 잔칫집에서 맛있다고 비싼 홍어만 먹다보면 주인의 눈치로 뒤통수가 무지무지 따갑습니다. 같이 먹는 사람과도 젓가락전쟁을 치르다보니 서로 미안하고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홍어삼합입니다. 걸걸한 막걸리와 목포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나는 삭힌 홍어, 삶은 돼지고기, 곰삭은 묵은 김치가 젓가락 끝에서 삼합을 이루며 혀끝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맛은 눈치와 염치가 만든 훌륭한 지혜의 음식입니다.

코를 톡 쏘며 펑 뚫리는 냄새에도 끊을 수 없이 당기는 이 맛, 골다공증 예방에 더욱 좋다는 홍어의 매력은 자꾸자꾸 먹고 싶은 끌림이 강한 중독성에 있습니다. 홍어는 바닷물 속에서 몸을 조절하기 위해 요소를 몸 안에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며칠 동안에 자체효소로 분해하여 암모니아 질소를 생성하고 톡 쏘는 독특한 냄새와 맛을 내지만 세균이 없는 인체에 유익한 성분이며 이를 삭힌다고 말합니다.

홍어애와 보리순과 된장을 넣고 끓인 홍어애국은 장청소와 술독을 풀어주는 독특한 음식으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남도만의 별미이며 홍어의 껍질을 은근한 불에 끓여 굳혀 묵을 만들어 먹는 것도 목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홍어꼬리는 가시가 수컷은 1줄 암컷은 3줄이 있어 구분이 가능하고 독을 품고 있어 귀신도 무서워 달아나고 홍어의 껍질은 뱀에 물린 독도 빼내는 해독작용도 탁월하답니다.

홍어수컷은 날개에 가시도 있답니다. 이 가시의 용도는 홍어가 사랑할 때 쓰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서 홍어는 부부의 금슬이 좋아 꼭 붙어 다니며 부부애를 과시한답니다.

어부가 공갈미끼로 낚시를 합니다. 공갈미끼를 먹이인줄 알고 암컷이 덥석 물고 먹으려는 순간 가시가 나 있는 날개를 얼른 말아 가시를 암컷 몸에 박으며 사랑을 시작합니다. 암컷은 수컷의 가시 때문에 사랑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드디어 어부가 낚시 줄을 당기고 두 마리가 한꺼번에 오라오는 횡재를 하게 됩니다. 육질이 찰진 암컷은 소중히 다루지만 수컷은 꼬리 옆의 두 개의 생식기를 잘라내어 “에잇” 바다에 내던져버립니다. 그만큼 홍어수컷의 생식기는 가시마저 있는 것이 걸핏하면 어부들의 손을 다치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며, 수컷이 발 벗고 따라와도 가격차이가 암컷과 비교가 안 되는 것도 맛이 암컷만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홍어의 수컷만을 잡는 방법도 있는데 암컷을 잡아 묶어 바다에 다시 내려 보내면 수컷들이 달려들어 사랑을 하게 되고 지조가 있는 암컷홍어지만 묶인 몸이라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수컷홍어들에게 당하며 몸이 갈기갈기 찢길 때까지 미끼가 되어 수컷들을 낚아 올린답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1891년 신유박해를 당해 흑산도로 유배를 온 손암정약전 선생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고가며 16년을 사시면서 흑산도 사람들과 돈독하게 지냈는데 특히 홍어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이라는 사람은 25살 되던 해 1891년 12월 태사도 지금의 태도로 홍어를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3년 2개월 만에 고향 우이도로 돌아오게 됩니다. 유구인 일본 오키나, 여송인 필리핀, 오문인 마카오, 중국 등을 표류하면서 체험한 내용들을 기억하고 돌아온 후 정약전선생을 만나 표해시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흑산도 주민 장창대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흑산도에 분포한 227종의 바다생물을 종류별로 구분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고의 수산사전인 자산어보도 쓰셨습니다. 그 중 홍어를 해음어라고 했으며 생긴 것이 음탕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암컷은 식탐에 죽고 수컷은 음탐에 죽는다고 수컷이 사랑에 한 목숨을 거는 통에 나온 말로 홍어가 사람들에게 몸으로 경종을 울립니다.

 

세발낙지

  •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고 했습니다.

    세발낙지가 다리가 세 개가 아니라 8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한자로 가늘세를 써서 세발낙지라고 하는데 가늘어서 연하고 맛있답니다.

    싱싱한 자연의 맛 그대로의 산 낙지, 시원한 국물 연포탕, 매콤달콤한 낙지 회 무침, 짚으로 감던 것을 요즈음은 나무젓가락에 감아 만든 낙지호롱이 등 입맛대로 선택하여 드실 수 있답니다.  

  세발낙지는 머리를 잡고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아서 머리부터 먹어야지 그냥 잡고 먹다보면 낙지다리가 얼굴에 딱! 달라붙어 내가 낙지를 먹는 것인지 낙지가 나를 먹는 것인지 모르고 얼굴에 붙은 낙지 다리 한 개씩 떼어 먹다보면 옆 사람이 숨넘어가도 모르게 맛있답니다. 낙지를 통째로 드시기 힘든 분을 위해 칼로 마구 탕! 탕! 탕! 조사서 만든 탕탕이를 접시 채 얼굴을 묻고 먹는 맛이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갯벌에 인삼이라고 할 만큼 타우린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지친 소에게 산 낙지 몇 마리 먹이면 곧바로 쟁기 들고 밭 갈러갔다고 자산어보에 쓰인 말이니 그 효과는 과히 짐작할만합니다. 삶에 지치고 돈 벌기에 지친 남편을 위해 목포 세발낙지를 준비해주시는 부인은 센스쟁이, 바로 힘이 벌떡 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목포에 오시면 어릴 적부터 맛 들여 온 낙지를 즐겨 드셨다고 하니 끝없던 열정과 힘이 이 낙지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군복을 입은 채 목포를 방문하고 숙소를 이훈동 조선내화회장 집으로 정하면서 세발낙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맛깔스런 전라도 음식과 제철인 산 낙지를 내놓자 박전대통령은 처음 먹어 본다고 신기해 하다가 너무 맛있다며 연거푸 몇 접시를 드셨다고 합니다. 논밭에서 일하다 탈진한 소가 산 낙지 몇 마리 먹고 다시 밭 갈러 갔다는 이훈동회장의 말에 놀라워하고 이훈동회장집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이 맛을 모르고 살 뻔했다는 말과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흥겨워했었다고도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목포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요?” “철도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비행기가 꼭 필요합니다.” 교통부장관을 바로 불러 목포비행장을 선물하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광주 초도순시 왔다가 예정된 호텔에 묵지 않고 목포에 와서 이훈동회장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답니다. 본의 아니게 목포의 영빈관이 되었던 지금의 전남문화재자료 이훈동정원에서 세발낙지 맛에 반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당시 교통의 오지였던 목포에 비행장을 만들 것을 지시하여 세발낙지가 목포에 비행장을 선물한 격이 되었답니다. 세발낙지의 힘이 대단하죠? 세발낙지 덕에 목포에 비행장까지 생겼으니까요.

 

갈치

  •  목포하면 먹갈치입니다 갈치는 야행성으로 성질 또한 급해서 물 밖에 나오면 바로 제 분에 못 이겨 금방 죽고 만답니다. 평상시는 칼이 춤추는 것처럼 머리를 위로 긴 몸을 세우고 둥~둥 떠다니다가 먹이 감을 발견하면 바로 낮은 포복으로 잡아먹는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갈치와 먹갈치는 종류가 다르다 라고알고 있지만 신토불이 토종 한국갈치는 한 종류밖에 없답니다. 다만 잡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며 은갈치는 낚시로 한 마리씩 잡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루어 은비늘이 안 벗겨지고, 목포 먹갈치는 큰 배의 그물로 많이 한꺼번에 잡다보니 서로 엉켜 붙어 은비늘이 대머리신사처럼 홀라당 벗겨진 것이랍니다.

먹갈치로 고춧가루 팍! 팍! 넣은 갈치 찜도 좋고, 노릇노릇 구워도 좋으며, 갈치창자로 담은 갈치창젓도 혀끝에서 밥이 살살 녹고 갈치새끼를 풀치라고 하는데 이것을 말려서 밑반찬으로 조려놓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답니다.

목포 앞바다 영산강 하구 둑에서 평화광장 앞바다까지 10월 한 달 동안은 집어등이 불야성을 이루고 갈치잡이 낚시 배들이 줄을 서서 은빛 반짝이는 갈치와의 한판 승부로 밤새는 줄 모르고 팽팽한 긴장과 짱짱한 손맛을 즐긴답니다. 선상에서 낚시로 잡은 갈치의 은비늘을 벗겨 회로 썰어 먹는 갈치회 맛은 전국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현장감 있는 회로써 목포에서만 그 맛을 느끼며 오감을 자극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밤에는 갈치가 수면위에 거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떠서 육 지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에 평화광장 방파제와 영산강 하구 둑에서 낚싯대만 던져도 앞 다투어 올라와 저렴하게 갈치낚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갈치의 실루엣을 실컷 구경하는 야~ 한 밤, 낚시미끼는 요즈음 1급수 아주 깨끗한 물속에서 사는 빙어를 사용하고 미끼가 떨어지면 즉석에서 잡은 갈치를 어슷어슷하게 썰어서 끼워 쓰기도 합니다.

“야식 시키신 분” 낚시하다 출출하다 싶으면 전화한통으로 배를 타고 야식까지 배달하는 목포는 참 좋은 곳이여!

10월이 되면 평화광장 앞바다는 춤추는 바다분수를 보러오는 관광객들과 운동하는 목포시민들, 그리고 은빛 유혹에 이끌려 갈치 잡는 전국의 강태공들까지 빛의 도시 목포는 북적댑니다.

10월 갈치는 돼지삼겹살보다 낫고 은빛비늘은 황소 값보다 높다는 속담이 있답니다. 어머니들이 아침에 예쁘게 화장하여 속박한 모습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아줌마에서 사모님으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일등공신이 바로 갈치입니다. 여성들의 화장품인 립스틱, 아이섀도우, 손톱매니큐어, 등 펄이 들어가는 화장품의 원료가 되고 여성들의 목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인조진주도 만든답니다.

여성들은 화장품으로, 남성들은 먹는 것으로 각광을 받는 갈치가 소화기능 촉진과 혈전을 막아주고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하여 오장의 기운을 돋우는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최고의 맛있고 멋있는 인생을 펼쳐드립니다.

 

꽃게

꽃게 새끼가 막 달려가고 있었어요. 어미 게가 보니 옆으로 가고 있지 뭐 얘요. “아가 보렴, 엄마처럼 앞으로 똑바로 가거라.” 하지만 어미 게도 아기 게처럼 옆으로 가고 있었어요.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대체로 게들은 잘 달리나 헤엄은 치질 못하는데 꽃게만은 부채 같은 다리로 물속에서 헤엄 칠 수 있다. 꽃게들이 헤엄치면 큰 바람이 불 징조이다. 맛은 달콤하고 좋다. 라고 썼으며 동의보감에는 꽃게가 열기를 푼다고 했습니다.

꽃게는 낮에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활동하며 모래나 진흙을 파고 들어가 눈과 촉각만을 남겨놓고 숨어서 먹이를 기다리다가 먹이가 다가오면 재빨리 집게발을 들어 작은 물고기를 공격하여 잡아먹는답니다. 6월 암게를 최고로 치며 꽃게를 뒤집으면 하얗고 단단한 꼭지가 복부를 덮고 있는데 암컷은 그것이 둥글고 수컷은 뾰족하답니다.

2년생 암컷 한 마리의 산란 수는 2만 여개나 되고 7~8월은 산란하는 시기로 금어기이며 싹쓸이로 씨를 말려 버린다면 맛있는 꽃게를 맛 볼 수 없으니 키워서 잡아먹자고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꽃게는 우리나라의 동해를 제외한 연안에 분포하며 서해연해에서 가장 많이 잡히고 맛있는 꽃게는 통발로 잡습니다.

꽃게의 껍데기가 삶으면 빨갛게 변하는데 이는 아스타산틴이라는 물질이 있기 때문이며 꽃게로 만든 찜, 탕, 게장, 꽃게무침이 바로 밥도둑이랍니다. 맛깔스런 양념에 잘 버무려 내놓은 꽃게무침은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가득고입니다. 살만 발라 무쳐서 참기름, 김 가루를 뿌려 삭삭 비벼먹는 환상적인 비빔밥은 잦은 숟가락질로 적어지는 밥을 탓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먹게 되는 것이 꽃게무침 비빔밥이랍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즐비한 이곳에 중국 만리장성의 진시황이 낄 자리가 없어 한 점도 못 얻어먹고 울고 갈 정도의 맛이 목포에 있습니다.

바로 그! 맛, 바로 이! 맛이 목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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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척식주식회사

근대역사관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김문심

 

△ 목포근대역사관 ((구)동양척식주식회사를 사진 전시실로 사용)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영국의 동인회사를 본따 1908년에 세워진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일제가 조선의 경제적 수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립한 회사로 식민지 경영의 수탈 창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성장한 회사다.이 회사는 일본 동경에 본점을 두고 우리나라에 9 개의 지점 목포. 군산. 대전. 대구. 부산. 서울. 평양. 사리원. 원산 교통이 편리한곳 ,또한 평야지역만 밀집되어 있다.고랭지 지역에는 이 회사가 없는 것을 보면 얼마만큼 쌀 수탈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목포지역의 경우에는 1909년에 나주 영산포 출장소에서 관 할 하였는데 목포항이 개항한 이후 목포는 일흑 삼백 (해태.쌀.소금.면화) 의 포구라고 불리었다. 목포가 급속도로 성장하자 1920년 6월에 이곳으로 이전 하면서 지점으로 승격하였으며 금융부와 관리부의 직제로 운영 되었다.

관리부에서는 농토관리 즉 소작관리를 하고 금융부에서는 각 농가에 돈을 융자 해주는 일을 담당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농업 이민 계획을 정치적으로 펼쳤는데 목포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계획적인 도시로 꾸며져 갔다.

 

근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기관들 일본인 거류지에 지어졌고 모든 시설이 일본인 위주로 도시화로부터 시작한 차별은 도시가 정착 되면서 여러 가지 시설 유치로의 차별로 이어졌다 학교 관공서 같은 시설은 물론 가로등 배수공사 마저 일본인 지역에 집중되며 조선인 지역과 일본인 지역이라는 이중 공간의 형성이 되었고 조선인지역은 열악했고 거류지도 무계회적인 도시로 근대시설이나 복지시설은커녕 제대로 된 ,상하수도 지어지지 않았고 . 조선 농민들에게 있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말 할 수 없는 수탈의 가해자 였으며 저항과 투쟁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당시의 주요 업무로는 농업경영.토지매매 및 임대.토지경영 및 관리 건축물의 매매 및 임대 ,이주민 모집및 분배.이주민에 대한 물품의 공급 및 생산 또는 분배.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금공급 부대업무 등 이였지만 결국 농업 경영과, 이민 활동을 주 사업으로 삼았다. 이민 사업은 기존의 소작농이였던 농민의 소작권을 박탈하고 이주민에게 불하를 전제로 자행 하였고 즉 농민들이 갖고 있던 토지의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탈하고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인적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업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요 활동이었습니다.

 

      

특히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을 관습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농민들은 소유를 증명함에 있어 자료를 충분하게 챙기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신고주의 방식에 의하여 직접신고를 해야 하는데 토지를 당연히 (私占地) 생각하여 이를 충실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수의 지주가 일촌 일족의 공유지나 농민의 토지까지 자신의 사유지로 함부로 신고했다. 반면 농민들은 토지를 잃은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편법으로 결국 토지조사사업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지가 계속 늘어났다.

이 같이 매입한 땅을 소작인들에게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모내기철에 종자조차 없어서 우선 고리대를 얻어 모내기를 마치면 논은 고리대의 담보로 압류되어 추수 이후에도 농민의 수중에 들어갈 것은 남지 않았다. 여기에 세를 내지 못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고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고리대금을 받는 형식으로 농민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진행하였다.

 

실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 하였는데 목포 지점의 경우 전남 각지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전국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 1의 지점으로 일제 식민지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임을 알 수 있다 .

1932대에 유행했던 이 난영 선생이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목포에 설음을 만들어 냈던 근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토지 경영뿐만이 아니라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조선 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다

목적은 일본 내 필요한 식량을 미곡을 얻기 위한 곡물 수탈에 제 1목표였다.. 이 동양척식주식회사 수탈하고 갖고 있는 토지를 소작농민들에게 분배하여 막대한 소작료를 받아냈다.

목포에 있는 건물은 해방이후 목포 경비부가 주둔 하였다가 1974년부터 1989년까지 목포 해역사 헌병대로 사용하다가 영암으로 이전 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0년 동안 폐허로 된 빈 건물로 청소년 우범지역으로 전략하여 주변에 언성이 잦아 철거작업이 시작 되었다.

 

돌아보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조선농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산 증인이요. 또한 5, 18때는 시민군의 감옥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관리인 하나 없이 방치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멀어져 갔었다, 웅장 했던 건물도 주인을 잃어버린 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늙어만 갔고, 한때 일제의 잔재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될 위기를 맞기도 하여 건물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제 이 건물도 10년 동안 묵묵히 참회와 속죄의 시간 이였나 보다. 그래서 시민단체에서 보존운동으로 철거가 중지되고 이 건물의 역사성이나 근대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전문가 의견에 따라 시민단체에서 보존해 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여 1999년 11월 20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174 로 지정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건축 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돌출된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건물로서 1층과 2층 사이의 외벽에는 방형의 문양 내에 양각의 원형 장식띠를 둘려져있다 창호는 수직창이 설치되어 건물의 수직성이 크게 드러나 있고 창문은 목재 오르내리는 창을 설치되어있다. 천장의 갓 둘레에는 몰딩 한 장식띠 가 여러 겹으로 둘러져 양 좌측 상단부 벚꽃문양 과 건물내부1층 벽면에 태양 문양이 등이 있다.

 

 

근대역사관의 설명을 듣고 있는 3함대 사령부 장병들

2006년 7월에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 하였다 .

1층에는 엣 목포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진들과 목포의 개항과 발전하는 모습이 전시되어있고 금융의도시 목포근대교육사, 목화의고장 일제의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특히 2층에는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사진들 .일본의 패망과 광복의 기쁨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우리나라의 아픈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목포에는 일제 강점기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근대역사관 주변으로는 민족운동 관계 유적으로 목포 청년회관 건물, 정명여학교 교사, 양동교회 호남은행목포지점(현 목포문화원), 동본원사목포별원, 심상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 강당) 그리고 일본인 개인주택 및 상가 건물 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들을 일본의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될 것이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과거 역사를 반복되지 않도록 현장감 있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자 관광자원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기대 합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적산 가옥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보존하는 등, 수선하고 유지하여 일본 관광객 유치에 온 정열을 쏟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적산가옥들이 한국에 상당수 남아있어 답사하는 일본인 교수들도 남아있는 일본인 촌을 보고 이렇게 잘 보존된 일본인 촌은 보기 힘들다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 일본인 학생 들은 측량하고 논문자료로 연구하는 모습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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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팔경

목포문화관광해설사 강미숙

 

맛이 있고 멋이 있고 낭만이 있는 목포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전남 문화 관광 해설사 강 미 숙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목포 팔경에 대한 여행을 떠나 볼까요.

목포 팔경은 소상팔경을 본따서 지은 것이다. 소상팔경은 중국의 북송대 송적이 그린 소상팔경도에서 영원한 승경의 상징이고 고려때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대 유행된 시조로서 우리나라와 일본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를 모방하여 송도 팔경, 광동팔경, 관서팔경, 관북팔경, 금강팔경 이름이 있고 우리 목포를 비롯하여 각 지역에도 이와 유사한 단구들로 지역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희 목포팔경은 공식 기록기록에 나타난 것으로는 유달상에 유선각에 걸려 있던 편액 목포팔경이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1950년대 제 6대와 제 8대 시장을 역임한 하동현의 이름으로 되어 있구요. 서명은 있으나 기록년월일 없는 것은 목포의 대표경관에 대한 구구한 견해들을 정리 통리 한다는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각계 각층 시민들과 사계에 조예있는 분들이 충분한 의견을 모아 목포팔경을 확정하고 시민을 대표하여 확인한다는 뜻으로 시장 직함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목포팔경의 내용은 무엇이 옳고 , 무엇이 틀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포는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유달상과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 세 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삼학도 그리고 바라라기 보다는 푸른 호수를 영상시키는 다도해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아름다운 동양화와 같은 항구도시입니다.

아름다운 목포의 풍경중 가장 빼어나라고 할 수 있고, 목포인들에게 사랑받는 풍경중 대표적인 8곳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제 1 경 <유산기암> 유달산의 기묘한 바위

 

 

 

유산기암은 목포팔경 중 으뜸이다. 산중에 산이라 불리며 남녁의 소금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유달산의 기암괴석이 갖는 신비함을 칭송하고 유달산의 기암괴석은 목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경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는 이름모른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신선이 따로 있던가, 꽃찾아 온 나비처럼 잠시 바위에 몸을 눕혀 바다를 쳐다보고 유달산을 한 품에 껴안을 수만 있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으리....

 

 

제 2 경 <용당귀범> 용머리 돌아오는 배

 

 

 

목포 팔경 중 하나인 용당귀번은 태고의 병풍바위와 하얀 물보라, 용머리 돌며 돛단배가 고하도 용머리 앞을 돌아오는 풍경

유달산에서 바라 본 고하도 풍경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푸른 호수로 비견되는 다도해를 뒤로하고 용머리 앞을 돌아오는 돛단배의 풍경이 어우러 진다면 그야말로 무등도원의 세계가 연상되는 절경이 연출 된다고 생각 합니다.

 

 

제 3 경 <아산춘우> 봄비 속에 청신하여진 아산

 

 

 

목포 팔경 중 유일하게 목파가 아닌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목포에서 눈을 돌리면 가장 저 시야를 사로 잡고 있는 곳

아산은 삼학도 건너편 영암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4 경 <입암반조> 갓바위에 드리운 저녁 노울 빛

 

 

 

저녁 노을 빛은 어디서 어디를 봐도 다 아릅답지만 가장 아름다운 저녁 노울 빛은 갓바위 부근의 풍경을 말하는 것으로 붉은 노울 갓바위 바다 , 산, 꽃 어울린 한폭의 그림 같은 곳

갓바위 슬픈 전설과 함께 지는 해가 아름답고, 입암산의 가파른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저녁 노울이 아름다운 입암반조

 

 

제 5 경 <학도청람> 삼학도의 시원한 바람

 

 

 

아지랑이 필때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봄날의 삼학도 풍경

삼학도 세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사랑은 바람되어. 전설이 되어 삼학의 한을 누가 달래 줄것인가?

저는 아니고 목포시민들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계시는 여러분!

여러분께서 저희 목포를 찾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면 삼학 세 처녀의 사랑은 여러분의 사랑으로 사랑을 찾을 것입니다.

 

 

제 6 경 <금강추월> 가을 달빛이 어린 영산강

 

 

 

영산강의 어느 가을날 밤. 가득찬 둥근 달이 영산강 물위에 떠 있는 저녁 풍경을 노래한 것입니다.

달빛에 흠뻑 젖은 영산강은 마치 우리네 목포인들의 인생처럼 바다를 향해 끝없이 끝없이 삶의 철학을 담은 금강추월을 기억 하시길 바랍니다.

 

 

제 7 경 <고도설송> 고하도 눈 덮인 소나무

 

 

 

왜 하필이면 목포 팔경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이 고도설송인가?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잦나무의 푸름을 알게된다고 했던 논어의 깊은 뜻을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하로 해송뒤에 하얀 눈이 엎어있는 겨울 풍경을 노래한 고도설송 시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시가 있다는 경지가 바로 고도설송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8 경 <달사모종> 달성사의 저녁 종소리

 

 

 

유달산 달성사에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와 고즈녁한 풍경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선조들은 목포팔경중에 하나로 달사모종(달성사의 종소리)을 꼽았습니다. 종소리는 원래부터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분류되었고 찰스램은 ‘제야’라는 시에서 종소리는 여러종류의 소리 가운데 천상에 가까운 음악이라고 노래 하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는 저녁 무렵 범종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는 신비감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았을 것입니다.

팔경중에 독특하게 소리와 관련된 마지막 목포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목포에서 오는 진정 아름다운 추억 한 페이지를 만드셨나요

혹시 부족하고 미비됐던 점은 너그럽게 봐 주시고 좋은기억 아름다운 기억만 기억하시고요. 다음 기회에 저희 목포를 다시 찾아 주신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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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등산로 입구에서 노적봉을 바라보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큰바위 얼굴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깃든 노적봉은 해발 60m 높이의 암석봉우리로 임진왜란 당시 이 암석봉우리를 짚으로 덮어 노적가리(쌀더미)처럼 보이게 하여 우리 군사의 군량미가 많은 듯 보이게 하고, 강물에 백토를 풀어 밥짓는 쌀뜨물이 강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로 하여금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는 하는 곳이 노적봉이다.

 

이 노적봉을 유달산 등산로 계단에서 노적봉을 바라보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큰바위 얼굴이 있다. 일부에서는 적군의 향해 호령하는 이순신 장군이 누워 명상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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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 용오름 둘레숲길

 

 

고하도는 높이 77m의 섬으로 목포 앞 선창에서 약 2Km쯤 떨어진 있으며 2012년 6월 목포대교가 개통되면서 현재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는 섬이다. 섬의 지형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며 용머리 또는 병풍처럼 펼쳐있다하여 병풍바위, 병풍도라고 불리기도 하며 순수한 우리말로 칼섬이라고도 합니다.

 

고하도 용오름 둘레숲길은 완만한 트레킹 코스로 용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승천하는 등허리를 타고 걷는 것과 같은 지형으로 산행시 용의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충무공이 1597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08일 동안 주둔하여 군사를 재정비했던 곳이다. 이충무공은 이섬을 전략지로 이용 임진왜란 때 왜적의 육지 침입을 막아낸 곳이다. 장군이 진을 쳤던 흔적과 그의 공적을 가리기 위하여 세워진 모충각이 이곳에 있었다.

 

'공생재활원'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불량아동을 수용하기 위해 건립된 감화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감화원은 '국립목포학원'으로 개칭되고 다시 '재생원'으로 개칭되어 고아들을 수용하다가 1960년대 폐원되었으며, 1984년 공생재활원이 건립되었다. 대도 조세형도 어린시절 이곳 감화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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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사의 산 증인 舊)湖南銀行 木浦支店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조 대 형

 

 

 

 

 

<구)호남은행 목포지점 측면>                                            <구)호남은행 목포지점 전면>

 

유명한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역사의 문맥이 가득 드러나는 곳이 목포(원도심)이다. 전라도 사람들에게 목포는 아련한 슬픔이 배여 있는 곳이다. 이난영의 ’목포의눈물‘의 애잔한 가락이 가슴 밑바닥에 여울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현대사의 굴곡이 깊게 패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목포는 1897년 개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목포진‘이 설치돼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일제가 식민지 경영전략의 일환으로 목포를 네 번째 개항장으로 낙점하면서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근대사 목포는 국내에서 4번째 개항되었으며 근대문물이 유입된 지나온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는 도시!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새롭게 성장된 유서 깊은 항구도시 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수탈의 기점 역할을 했던 눈물의 도시 목포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도심의 모습으로 지금도 개항장 일본인 거류지 중심으로 영욕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근대 건축유적이 잘 보존되어있다. 오늘날 목포의 새로운 관광자원인 “근대문화유산의 보고” 1번지가 바로 목포이다.

근대문화의 현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 합니다. 지금부터 근대역사도시 목포로의 시간여행을 함께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건축은 한시대의 산물로 그 시대를 살아온 인간 삶의 흔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건축 유적을 통해 근대사와 민족수난의 역사와 더불어 목포 변천사를 대변하는 근대건축물 중 하나, 개항도시 목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금융계 건물인 ‘구)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등록문화재 제29호로 등록된 본 건물은 이 지역 산업 발전을 위해 일본 자본에 대항한 호남지역 인사들에 의해 이 지역을 토대로 당시 호남부호였던 현준호, 김상섭, 김병로 등 당시 돈 150만원 자본금으로 1920년 10월 2일 설립되었다.

 

현 건물의 건립은(소재지:전남 목포시 상락동 1가 10-2) 대지 427평 건평 256평의 2층 벽돌 건물로 1929년 11월 11일 신축이전 되었다. 목포항이 개항된 후 목포는(쌀, 목화, 소금) 일본으로 수탈해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한때 전국3대항, 남․북한을 합쳐 6대도시로 불릴 만큼 크게 번창하였다. 당시 1930년대 목포 인구 56,000여명, 전국무역량 6위로 부상할 수 있는 목포경제 후견자로서 젖 줄기 역할을 수행한 본 건물은 82년의 역사, 지금도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건축 공사비는 약 22,000원(당시화폐).

 

건물의 특이한 점은 건물 가운데 기둥이 전혀 없이 건립되었다. 현대 건축양식 처럼 철근 콘크리트 스라브 건물 이라면 가능 하겠지만 건물 중앙에 기둥이 전혀없는 건축 기술은 실로 감탄 할만하다 일본인 건축가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에 나타나 있다.(대들보 상량문귀 건축가 日本 森安照)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면 건물 뒤틀림(각도편차)이 나타나는데, 구)목포일본영사관 건물보다 편차가 적었다 한다. 현재 외벽 타일 벽돌이 탈색되거나 파손, 또는 금간 곳 하나없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근대 건축물의 최고 유적임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리고 빗물받이 및 물받이 초롱(재료 황동)은 전혀 부식되지 않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최근 모양이 초라하다하여 견고한 스텐레스로 교체되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지반 역시 암벽(반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균열이나 침하, 틈이 전혀 없으며 외벽 타일은 검은색 계열 붉은색으로 러시아 産으로 타일 한 장 한 장 종이로 포장되어 수입되었다고 한다. 튼튼하고 견고함을 실례로 들어보자.

 

6, 25 사변당시 북한군 장갑차가 건물을 들이 받았으나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장갑차가 대파되었다고 한다. 또한 외벽은 총탄 세례를 받았으나 타일벽돌은 파손은 없고 흠집만 남아 질곡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경찰서장이 허가한 車庫건축 허가증>

 

 

역사적 의의는 당시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 지점이 있었으나 이러한 특수 은행만으로는 보편적인 금융을 기대하기가 혼란한 처지로 설립 되었는데 1933년 7월 동래은행을 흡수 합병하게 되므로서 영업지역을 경상남도 지역으로까지 확대하고 아울러 동래, 거창, 영광, 담양 등지에 까지 지점을 설치하여 영업망 확대실시로 자본금 200만원으로 늘려 대 은행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일본은 1928년에 신 은행령을 발표하고 민족계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인 자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식민지 금융정책을 강화하면서 민족계 은행의 통합을 강요하였으나 호남은행은 이 같은 식민지 지배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독자 운영하다가 총독부의 일본인 자본참가를 거역하고 일본인 직원 채용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東一은행과의 통합을 강요한 결과 마침내 1942년 5월 1일 합병 당하게 되었다.

 

그 후 1943년 7월 26일 합병으로 ‘(주)한성은행’ 목포지점이 1943년 10월 1일 신설 합병으로 본 은행은 ‘조흥은행’ 목포지점으로 다시 출발하여 민족계 은행으로 그 계보를 이어 시중은행 최고 의 역사와 전통의 은행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나 2005년 ‘신한은행’으로 합병당하는 비운의 운명적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현재는 신한은행 소유로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호남은행은 일본의 식민자본 이식에 맞서 설립한 은행으로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주자본과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설립함으로써 근대화의 자주적인 모습을 어느정도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등록문화재 제29호 등록된 표시>

 

 

건축사적 의미로는 구도심의 번화가인 오거리에서 선창가 쪽 100여m 되는 삼거리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개항 역사와 더불어 목포 근대사의 상징이 되는 당시 번화가인 쇼핑거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영욕의 근대사의 상징의 거리 이기도하다. 오거리는 신파의 거리로써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거주지 접경지역으로 양측간 분쟁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다. 현재 본 건물 1동과 그 뒤로 연결된 부속건물(화장실, 식당, 서고, 지하창고등) 건물은 단순한 장방형의 2층 건물이며 외부는 검은색 계열의 붉은색 타일로 마감되었다. 하단(기단부)은 1.1m 높이의 석조로 마감되었으며 내부 2층으로 오르는 목조 계단은 안타깝게도 최근 엘리베이터로 교체되어 장식된 문양의 계단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면 중앙과 양측면에는 짧게 포치를 두었는데 특히 양 측면 출입구만은 3단 몰딩한 화강석 처리, 창문은 정면에 4개 측면 각각 3개의 수직창이 2층까지 설치되었으며 안쪽으로 2단을 접어 긴 건물의 입체감과 함께 수직성이 유난히 드러나 보인다. 1,2층 사이의 외벽에는 장식의 방형 문양띠가 수평으로 둘러져 있다.

정문에는 지금은 현대적 간판이 걸려 있지만 그 안에는 예전에 음각된(주식회사 조흥은행 목포지점(株式會社 朝興銀行 木浦支店) 글자가 새겨져 있다.(그중 조흥 두 글자는 원래 호남이었던 것을 후에 바꾸어 놓음)

 

이 글씨체는 한자 오체 중 하나인 해서체다. 이 글씨는 타계한 제주도 출신 서예 대가이신 소암 고 현중화 서예가의 글씨로써 특이한 점은 글자 중 浦(′)마지막 획이 누락되어 있다. 목포지점이 번창하면 찍겠다는 설이 있고, 나라가 독립하면 찍겠다는 설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 1획(점)은 빈 그대로 남아있다. 비어있는 획은 오늘날 무슨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가 자주성을 지킨 호남은행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본 건물은 개항도시 목포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건축사적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한국 근대 건축 저변확대에 큰 역할과 함께 개항 역사도시 목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금융계 근대 건축 유적으로서 금년 신축이전 82주년이 가까워오는 인생 나이 산수(傘壽)가 지난 세월만큼 고풍스러운 자태에 늠름히 버티고 서있는 위용은 한국 금융사의 산 증인이며 버팀목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해방 된지 66년 항구도시 목포는 일제 호남수탈의 창구로서 영욕을 간직 한 채 역사의 유산들을 걸머지고 있다. 개항 역사도시 목포는 본 ‘호남은행’을 중심으로 목포최초 서양식 건물로 주목 받고 있는 ‘구)목포일본영사관건물’(사적 제289호)과 일본 건축 양식인 일본사찰 동본원사 목포별원 그리고 학교 건물 등 많은 등록 문화재로 등록된 근대 건축물과 그 외 일제 가옥 등 근대 유적이 즐비하게남아 한국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이르키는 역사성 시대성 있는 상징적 건물로써 또한 종교 시설물 등 개항 도시로써 역사성 정체성 확보로 근대사와 민족의 수난의 역사와 더불어 목포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가히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만하다. 이러한 근대 건축유산들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도시발전의 요소로 자리매김 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한 획을 그은 문화유산의 산물 목포의 모습이다. 그래서 목포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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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김 연옥

 

 

우리 목포는 1897년 10월에 개항하였으며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군이라 불리웠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 또는 무안군으로 불리웠습니다.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목포가 제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세종21년 만호진이 설치된 때부터입니다.

목포는 부산 인천 원산에 이어 4번째로 개항을 했습니다.

목포라는 이름은 고려사라는 역사책에서 처음 나오는데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라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나는 포구라하여 목포라는 설도 있고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이라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곳 국립 해양문화재연구소는 물,바다 사람,배,꿈,삶 그자국들이 어우러진 국내 유일의 해양 박물관입니다.

바다의멋과 예술이 살아있는 국립 해양문화재 연구소는 1994년 12월 개관하여 2009년 4월 27일 국립 해양 유물 전시관에서 국립 해양 문화재 연구소로 기관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이는 수중문화재가 집중분포된 서해안 지역의 수중문화재 조사 수요급증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한것입니다.

여기 전시관은 해저에서 건져올린 옛배와 다양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랜 해양 역사흔적을 보존전시함으로서 뿌리 깊은 해양문화와 전통을 일깨우며 우리나라의 해양문화사를 쉽게 이해할수 있는곳입니다.

1전시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 전시실은 세계 수중문화재 발굴역사와 우리 나라 바다에서 발굴한 다양한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완도선은 전남 완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도자기 운반선입니다. 우리 바다 곳곳에서는 옛 배와 수많은 문화재가 발견되고 있으며, 이 문화재들은 우리 역사 복원을 위한 중요한 자료입니다.

 

 

 

 

수중문화유산이란 바다나 강·호수·늪지 등 물에 잠겨져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말합니다.

수중문화유산은 육상의 문화유산보다 보존이 잘 되어 한시대의 문화현상 단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중문화재와 수중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1976년 신안해저문화재 발굴조사를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안해저발굴 이후, 10여건에 이르는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는 우리 해양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완도해저 발굴조사

1983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키조개 채취작업을 하던 잠수사들이 몇 점의 옛 그릇을 건져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수중유물에 대한 관심을 한껏 높여준 신안해저 발굴이 끝나 갈 무렵이었으며, 또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문화재청(당시문화재관리국)은「완도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조직하고 수중발굴조사( 1983 - 1984년)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해저에는 수 많은 유물을 가득 실은 옛 배 한 척이 침몰되어 있었습니다.

침몰된 배는 심하게 부식된 상태였지만, 특히 3만여 점의 도자기는 보존상태는 양호했으며, 이 외에 솥, 청동그릇, 숟가락 등의 선원생활품과 도구들도 남아 있었습니다.

완도 앞바다에 침몰한 이 배는 10톤 규모의 외돛배이며, 11세기 중·후반경 해남 진산리에서 그릇들을 싣고 항해하다가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 침몰한 고려시대 상선(商船)이었던 것입니다.

완도해저 발굴의 성과는 11세기 후반경 고려 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부진했던 '우리배(韓船)'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한 점을 들수 있습니다.

완도선의 유물

완도선에는 30,701점이나 되는 유물이 실려 있었다. 고려청자가 30,645점, 잡유 26점, 토제품 2점, 철제품 18점, 목제품 9점, 석제품 1점 등입니다.

완도해저 고려청자는 11세기 후반경에 만들어진 녹청자계통의 도자기입니다. 도자기의 특징과 발견된 지점으로 보아 실생활용 그릇으로 추정됩니다. 도자기 종류는 대접과 접시, 완, 잔 등이 대부분이며, 청자광구병(廣口甁) 103점과 청자매병 11점, 그리고 청자장구 2점, 유병(油甁), 호(壺), 발(鉢) 등이 있습니다. 도자기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진산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녹청자 생산지로서, 1983년 가마터 104기가 조사되었습다.

해남 진산리는 내륙과 바다, 영산강의 자유로운 해운교통 조건을 갖추고 있어 도자기 수송에 매우 유리한 지역입니다. 완도선은 이곳에서 도자기를 가득 싣고 진도와 해남 땅끝, 완도 본섬을 지나 남해안으로 항해하다 약산도 앞 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음은 2전시실인 신안선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동하면서 건물밖의 바다를 보게 되겠습니다.

이건물의 특징적인게 통유리를 이용하여 바다를 볼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바로 밖의 바다에는 옛어로 전통 방법들이 실제로 설치되어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습니다.

덤장,게맥이,죽방렴

 

그럼 제2전시실을 관람 하겠습니다.

 

2전시실

-700년전의 약속

이 전시실은 700년 전 고려해저에 침몰한 중국 무역선과 다양한 무역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신안선은 1323년 여름,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였으며, 전남 신안해저에 침몰된 불운의 무역선입니다. 배에는 수많은 무역품이 실려 있었습니다.

 

 

신안선은 중세 중국과 일본 간의 무역선입니다.

14세기는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중국은 원(元)왕조, 일본은 가마쿠라막부시대로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는 시대였습니다.

1323년 여름, 신안선은 당시 중국의 무역항 경원(慶元 ; 현재의 영파)에서 수만점의 무역품을 싣고 일본을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최종목적지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찰 동복사(東福寺)였습니다. 서남계절풍을 이용해 고려해역을 지나는 국제 교역항로인 남로(南路)를 따라 항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약 700년후 신안선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전남 신안 해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신안선이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표류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물 분석결과, 신안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중국인 선원과 일본인 무역품 주인 또는 그 대리인 등으로 추정됩니다.

침몰선은 발견지역을 따라 신안선이라 부르고 있으며, 700년간의 역사적 비밀은 배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항해시기와 국적을 알려주는 유물들

 

 

항해시기와 국적을 알려주는 유물들

 

다음은 제3전시실입니다.

 

3전시실

자산어보를 찾아서

 

 

자산어보와 황금어장 '서해'

 

우리나라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세계적으로 광활한 갯벌을 가진 해역으로서, 다양한 해양 수산 생물이 서식하는 황금어장입니다. 자산어보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전(丁若銓 ; 1758~1816년)이 서남해의 섬 ‘흑산도’에 유배왔을 때 저술한 책입니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천주교인들을 박해한 신유사옥(辛酉邪獄 ; 1801년) 때 유배되어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고, 흑산도 부근의 우이도(신안군 도초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산어보는 해양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자산이란 흑산(黑山)과 같은 뜻으로,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사용했던 이름입니다. 정약전은 바다-섬-섬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실학정신을 펼쳤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여러 문헌을 읽고, 물고기를 직접 해부하면서 생김새부터 습성·분포·효능·요리법까지 다양하게 연구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물고기 사전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 1803년) - 조선시대 유명한 문장가 인 김려(1766~1821년)가 쓴 남해안 물고기 사전입니다. 우해는 진해(鎭海)의 별칭으로, 김려는 경남 진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진해 연안의 물고기의 형태와 습성, 효능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 1814년) - 조선시대 실학자‘정약전’이 쓴 해양수산생물 사전입니다. 이 책은 흑산도 주변 해역의 물고기 약 200종류를 소개하였고, 김려의‘우해이어보’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1820년) -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년)가 쓴 책으로, 물고기의 한글과 한자 이름, 생태·요리·맛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도 다양한 물고기와 고기잡이법을 소개하였습니다.

 

4전시실

이 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우리 배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배는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같이 고기잡이 도구이자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획기적인 도구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부터 바닷길을 개척하였으며, 이렇게 오랜세월 축적된 지혜와 기술이 우리 전통배 '한선'입니다.

 

 

한선이란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에 살고 있으므로 먼 옛날부터 강과 바다에 삶의 터전을 일궜으며, 고유한 해양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하여 수 천년 동안 바다를 개척하고 강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땅과 바다 조건에 맞는 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배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일 테지만, 구체적인 역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사인들은 처음엔 쉽게 구할 수 있는 통나무에 올라타고 손으로 물을 젓거나,뼈나 나무로 노를 만들어 물을 저었을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타기도 했습니다. 차츰 더 편리하고 안전하며, 쓰임새 있는 배를 갈망하여 온 결과 교통, 화물 운반, 고기잡이, 먼 항해, 전쟁 등 쓰임새에 맞는 갖가지 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어떤 형태의 배를 만들어 사용하였을까?'

아직 그 내용에 대하여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는 단계지만, 몇몇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한선(韓船)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환경에 알맞도록 발전하고 이어져 내려온 고유한 우리 배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특히 우리 한선은 배밑이 평평한 평저형선(平底型船) 구조를 고집합니다. 이는 수심이 비교적 낮은 우리 해안의 환경 특성을 고려하여 배가 안전한 항해와 정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선조들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전시실을 관람 하셨고요,우리나라 해양역사와 문화 전통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국립 해양문화재 연구소 밖으로 나가시면 야외 전시장에

새우잡이인 멍텅구리배,가거도 멸치잡이배,제주도 떼배등 실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들려서 보시고요, 더불어 주변에는 자연사 박물관,남농기념관,갓바위,갓바위해상보행교,평화광장,물과 음악 그리고 빛의예술 춤추는바다분수등 볼거리가 아주많습니다, 남은시간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posted by 해맑은목포

   

목포는 왜, 눈물을 노래했는가?

 

 

 

 

 

 

목포시 문화관광 해설사

곽 순 임

 

 

 

 

 

일본의 침입과 강화도 조약

 

일본은 조선이 일본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펴자 조선에 무력으로 진출을 시도하기위해 군함 30여척 (운요호, 운양호 등) 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875년 8월 21일 일본은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진을 공격하고 일본군을 상륙시켜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하게 된다.

전투결과, 조선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모두 패하였다.

고종13년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약 (한일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으로 조선에게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있으며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하고 부산 외에 두 개가 항구를 개항하며 개항장을 설치하고 개항장내의 일본인의 치외 법권 인정, 일본이 자유롭게 조선연해를 드나들 수 있게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성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반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 결국, 조선정부에서는 부산 1876년, 원산 1880년, 인천 1883년에 항구도시로서 개항하게되니 이는 일본의 강압적인 개항이라 하겠다.

 

목포개항과 의의

 

목포개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미 개항된 개항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일본과의 조약에 의한 개항이 아닌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자주적인 개항이었으며 일본인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으로 무안감리서와 목포해관을 미리 설치하여 개항장 업무를 차근히 준비했다.

즉, 개항장을 늘리고 무역을 늘림으로써 관세수입을 늘리고 이를 담보로 차관을 빌린다던가, 직접 재정수입원을 늘릴 수 있다는데 착안한 것이며 지주 상인층을 육성하여 자본가 층을 육성하고자 하는데 구상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정부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1897년 10월 1일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목포가 개항을 하게 되지만 그전에 이미(1894년) 일본 측에 의해 목포개항이 요구된바 있었으나 아관파천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 조선에 강요할만한 힘이나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 무산되었다.

따라서 목포의 개항은 일본과의 강제조약에 의한 것이 아닌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미리 준비된 자주적인 개항이었다는데 크게 의미를 두고 있다. 목포개항은 역사적,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영산강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배로 직접 화물 운반이 가능하며, 화물의 집하장으로 이용하기에 적합하고 호남평야의 쌀을 수송하기에 편리한 항구라는 점에서 작용된 결과였다

 

일본인 거류지 형성

 

일본은 항구도시의 특성을 이용하여 물류기지로의 수탈을 자행하면서 자국의 농어민을 조선으로 이주해 온다.

목포도 예외는 아니다. 개항당시 목포는 목포 진을 중심으로 유달산 봉수대를 운영하는 사람들과 진을 지키는 군사 외 다수의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1898년부터 일본 큐슈지방의 농어민들이 하나둘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작은 촌락마을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주를 당하고, 600년 역사를 간직해온 목포진 또한 일본에 의해 폐진을 당하게 된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척박한 곳을 매립을 해가며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하고 영역을 넓혀가면서 토지를 매매하기 시작한다. 당시 거류지는 갯벌이 아니면 논, 언덕으로 매립을 하거나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내지 않으면 한곳도 건축에 적합한 곳은 없었다.

점차 시가체제를 갖추기에 이르고 일본인 마을은 선창가주변을 거류지 중심으로 발전해 나간 것에 비해 조선인들은 유달산 자락을 터전으로 옹기종기 초가집을 짓고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개항장 안에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고 인구는 늘어나 1920년대 목포인구수는 3만여명이었으나, 1930년대에는 6만여명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면적 8.6km² 로 전국의 3개항 6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구) 일본 목포 영사관

 

 

일본은 목포개항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영사관을 짓고 영사를 파견하여 위임장을 주고 목포주재 일본영사임을 공인하게 한다.

1910년 발행된 “목포진”(일본인 의 기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일본측의 목포 진출과 외교업무를 위해서 1897년 10월 26일 처음 목포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의 이익 특히 무역, 교통 및 조약의 거류를 준수케 하며 일본

또는 일본과 우호적인 타국시민의 의뢰나 청구가 있을 때 공권력을 부여하고 일본법을 훈령에 준거하여 재반 사무를 담당케 한다‘ 라고 하는 명목하에 목포주재 일본영사관을 설립했다.

물론 처음부터 영사관 건물을 건축한 것은 아니다.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던 중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1900년 1월부터 (현)영사관자리에 건물을 신축, 동년 12월에 완공한다. 군수물풉과 하납도 물품을 일본으로 빼돌렸던 항구중 하나인 목포항은 1897년 개항이후 근대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무인감리서는 우리 정부가 외교업무와 지방행정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하였다면, 일본영사관은 일본정부에 의해 목포진출과 침탈, 지방행정, 외교업무를 목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목포개항이후 최초 서양식 건물이면서 가장 높은 건물 이었던 영사관 건물은 장방형의 2층 구조에 붉은 벽돌과 흰색벽돌을 사용하였고, 좌우대칭으로 전면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현관은 목재로 입구를 돌출시켜 만들었고, 창문은 아치형에 오르내림 창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건물의 내부에는 각 실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여 모두 9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2층의 두 곳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 1기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집 한 채 값을 호가하는 고가품 이였다고 한다.

건물의 외벽을 보면 건물의 중심부 상단에 위치한 원모양에는 일본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변하여 그 문양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아서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 하다. 양측 벽면의 상단에 일장기 모형의 벽돌배치, 건물내부 벽난로에 새겨진 벚꽃 문양 등이 일본 건축임을 암시하는 물적 증거들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목포의 수탈

 

 

일제식민지배와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3월 일본국 제24회의에서 동양척식 회사법이라는 것이 통과됨에 따라서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위해 만들어진 일본의 국책 회사이다.

일제식민정책의 선봉기관이며, 조선농민의 수탈기관으로서 일제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다.

일본농민을 조선 이주를 목적으로 한 회사로서 설립이 확정됨에 따라 일본에서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일본정부와 한국정부 즉 한,일 양국의 이중국적 회사로 출발했다.

설립당시 자본금은 1,000만원 이였다.

한국정부는 설립자본금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하지만 일본정부가 독단적으로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식민지 척식사업을 담당한다.

창립당시 척식에 필요한 농업, 토지매매, 임차, 경영 등의 한국농민에게 필요한 물품공급과 생산, 획득물품의 분배, 척식자금의 공급 등 일본정부가 허가하는 부대사업등을 총괄하였다.

회사법의 개정에 따라 척식자금의 공급에 주력하면서 토지수탈을 전제로한 일본농어민 이주사업, 농업경영, 토지개량 등의 사업에 초점을 두었다.

창립당시 양국의 이중국적의 회사로 출발했으나, 1910년 한국이 모든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국적의 회사로 탈바꿈 하게되고 조선농민의 수탈기관이요, 한국인의 피를 빨아먹는 유령회사가 되었다.

서울에 본점을 두다가 도쿄로 본점을 이전하고 1938년 말에는 전국에 9개의 지점을 갖게 되면서 총 831명의 직원을 두게 된다.

일본정부는 목포가 개항지로서 급속도로 성장하자, 1920년 6월에 동척 목포지점을 설립하게했다.

목포지점 설립당시 목포의 인구는 3만여명에 달했고 그 중 일본인은 2000여호 가구수에 1만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거류지영역을 확실히 굳혀가고 있었다.

목포지점 동척에는 관리부와 금융부가 있었는데 관리부에서는 농토관리 즉, 소작관리를 주로 했으며 일본인을 상대로 동척 농업이민계획을 정치적으로 펼쳐서 조선지역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 하여 조선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금융부에서는 각 농가에 돈을 융자해주는 일을 담당했다.

일본농어민에 대해서는 각종 특혜를 줌으로써 일본 농민들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한국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불이익의 대상이였다.

대출이자가 연금리 3부였고, 담보 없이는 대출도 가능하지 않았다한다.

목포지점은 설립당시 전남 각 지역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전국의 9개 지점중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두던 1위 지점이었다.

 

 

 

 

목포의 눈물

 

부동산 담보대출을 통해 조선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던 동척이 목포에지점을 설립한 이유를 본다면 농수산물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목포에서는 1900년 초부터 육지면화 시험재배지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광범위한 목화재배를 했고 목포인근에 위치한 나주평야에서 나는 쌀, 신안의 소금과 김, 그리고 영암,무안에서 농작물을 공출하여 배를 이용하여 운송하기 좋은 입지조건에 있었고, 1906년에 착공한 국도 1,2호선이 1911년에 개통하게 되는데, 1호선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939.10km), 남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직선거리를 말하고, 2호선은 목포에서 부산 (353.60km)까지, 즉 서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육로를 이용하여 중국까지 화물을 운송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1914년에 호남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호남지역의 곡물이 기차를 이용해 일본으로 공출 하기위한 화물 수선이 많았으며 실제로 목포에서 부산까지 14시간 걸린 완행열차가 1980년대 까지 운행을 했었다.

또한 배를 이용해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하기 좋은 입지조건에 있었던 이유가 크겠다.

이렇듯 일본은 전국 곳곳에서 만행을 저질렀고 특히, 동척건물은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을 위한 기관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교묘한 방법으로 수탈했었다는 점과 이로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뼈저린 아픔을 겪었을 우리

조상님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고, 목포를 근대도시라 칭한다면 이 건물은 근대건축으로 분류하고 일본의 건축이면서도 도지정 문화재, 지방기념물 제 174호로 지정을 했다.

 

 

1930년대 유행했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에 등장하는 목포의

설움을 만들어 냈던 근원지가 되기도 한 동척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물이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될 위기에 놓여 건물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 본건물만 남아 근대역사관으로 명명하였다.

끝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한때는 금지를 당했던 “목포의 눈물” 노래 한곡을 목포를 찾으신 모든 분들께 선물하면서 암울했던 목포의 옛 과거사를 마무리 한다.

  

 

 


 

목포의 눈물

 

작사 문일석

작곡 손목인

노래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 드든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닮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밤 조각 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posted by 해맑은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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