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주식회사

근대역사관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김문심

 

△ 목포근대역사관 ((구)동양척식주식회사를 사진 전시실로 사용)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영국의 동인회사를 본따 1908년에 세워진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일제가 조선의 경제적 수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립한 회사로 식민지 경영의 수탈 창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성장한 회사다.이 회사는 일본 동경에 본점을 두고 우리나라에 9 개의 지점 목포. 군산. 대전. 대구. 부산. 서울. 평양. 사리원. 원산 교통이 편리한곳 ,또한 평야지역만 밀집되어 있다.고랭지 지역에는 이 회사가 없는 것을 보면 얼마만큼 쌀 수탈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목포지역의 경우에는 1909년에 나주 영산포 출장소에서 관 할 하였는데 목포항이 개항한 이후 목포는 일흑 삼백 (해태.쌀.소금.면화) 의 포구라고 불리었다. 목포가 급속도로 성장하자 1920년 6월에 이곳으로 이전 하면서 지점으로 승격하였으며 금융부와 관리부의 직제로 운영 되었다.

관리부에서는 농토관리 즉 소작관리를 하고 금융부에서는 각 농가에 돈을 융자 해주는 일을 담당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농업 이민 계획을 정치적으로 펼쳤는데 목포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계획적인 도시로 꾸며져 갔다.

 

근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기관들 일본인 거류지에 지어졌고 모든 시설이 일본인 위주로 도시화로부터 시작한 차별은 도시가 정착 되면서 여러 가지 시설 유치로의 차별로 이어졌다 학교 관공서 같은 시설은 물론 가로등 배수공사 마저 일본인 지역에 집중되며 조선인 지역과 일본인 지역이라는 이중 공간의 형성이 되었고 조선인지역은 열악했고 거류지도 무계회적인 도시로 근대시설이나 복지시설은커녕 제대로 된 ,상하수도 지어지지 않았고 . 조선 농민들에게 있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말 할 수 없는 수탈의 가해자 였으며 저항과 투쟁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당시의 주요 업무로는 농업경영.토지매매 및 임대.토지경영 및 관리 건축물의 매매 및 임대 ,이주민 모집및 분배.이주민에 대한 물품의 공급 및 생산 또는 분배.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금공급 부대업무 등 이였지만 결국 농업 경영과, 이민 활동을 주 사업으로 삼았다. 이민 사업은 기존의 소작농이였던 농민의 소작권을 박탈하고 이주민에게 불하를 전제로 자행 하였고 즉 농민들이 갖고 있던 토지의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탈하고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인적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업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요 활동이었습니다.

 

      

특히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을 관습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농민들은 소유를 증명함에 있어 자료를 충분하게 챙기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신고주의 방식에 의하여 직접신고를 해야 하는데 토지를 당연히 (私占地) 생각하여 이를 충실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수의 지주가 일촌 일족의 공유지나 농민의 토지까지 자신의 사유지로 함부로 신고했다. 반면 농민들은 토지를 잃은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편법으로 결국 토지조사사업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지가 계속 늘어났다.

이 같이 매입한 땅을 소작인들에게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모내기철에 종자조차 없어서 우선 고리대를 얻어 모내기를 마치면 논은 고리대의 담보로 압류되어 추수 이후에도 농민의 수중에 들어갈 것은 남지 않았다. 여기에 세를 내지 못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고 양곡을 빌려주고 가을에 고리대금을 받는 형식으로 농민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진행하였다.

 

실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 하였는데 목포 지점의 경우 전남 각지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전국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 1의 지점으로 일제 식민지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임을 알 수 있다 .

1932대에 유행했던 이 난영 선생이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목포에 설음을 만들어 냈던 근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토지 경영뿐만이 아니라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조선 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다

목적은 일본 내 필요한 식량을 미곡을 얻기 위한 곡물 수탈에 제 1목표였다.. 이 동양척식주식회사 수탈하고 갖고 있는 토지를 소작농민들에게 분배하여 막대한 소작료를 받아냈다.

목포에 있는 건물은 해방이후 목포 경비부가 주둔 하였다가 1974년부터 1989년까지 목포 해역사 헌병대로 사용하다가 영암으로 이전 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0년 동안 폐허로 된 빈 건물로 청소년 우범지역으로 전략하여 주변에 언성이 잦아 철거작업이 시작 되었다.

 

돌아보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조선농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산 증인이요. 또한 5, 18때는 시민군의 감옥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관리인 하나 없이 방치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멀어져 갔었다, 웅장 했던 건물도 주인을 잃어버린 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늙어만 갔고, 한때 일제의 잔재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될 위기를 맞기도 하여 건물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제 이 건물도 10년 동안 묵묵히 참회와 속죄의 시간 이였나 보다. 그래서 시민단체에서 보존운동으로 철거가 중지되고 이 건물의 역사성이나 근대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전문가 의견에 따라 시민단체에서 보존해 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여 1999년 11월 20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174 로 지정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건축 양식은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돌출된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건물로서 1층과 2층 사이의 외벽에는 방형의 문양 내에 양각의 원형 장식띠를 둘려져있다 창호는 수직창이 설치되어 건물의 수직성이 크게 드러나 있고 창문은 목재 오르내리는 창을 설치되어있다. 천장의 갓 둘레에는 몰딩 한 장식띠 가 여러 겹으로 둘러져 양 좌측 상단부 벚꽃문양 과 건물내부1층 벽면에 태양 문양이 등이 있다.

 

 

근대역사관의 설명을 듣고 있는 3함대 사령부 장병들

2006년 7월에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 하였다 .

1층에는 엣 목포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진들과 목포의 개항과 발전하는 모습이 전시되어있고 금융의도시 목포근대교육사, 목화의고장 일제의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특히 2층에는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사진들 .일본의 패망과 광복의 기쁨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우리나라의 아픈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목포에는 일제 강점기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근대역사관 주변으로는 민족운동 관계 유적으로 목포 청년회관 건물, 정명여학교 교사, 양동교회 호남은행목포지점(현 목포문화원), 동본원사목포별원, 심상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 강당) 그리고 일본인 개인주택 및 상가 건물 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들을 일본의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될 것이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과거 역사를 반복되지 않도록 현장감 있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자 관광자원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기대 합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적산 가옥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보존하는 등, 수선하고 유지하여 일본 관광객 유치에 온 정열을 쏟는 사업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적산가옥들이 한국에 상당수 남아있어 답사하는 일본인 교수들도 남아있는 일본인 촌을 보고 이렇게 잘 보존된 일본인 촌은 보기 힘들다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 일본인 학생 들은 측량하고 논문자료로 연구하는 모습 볼수 있다.

 

posted by 해맑은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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